나의 아름다운 정원

저자
심윤경 지음
출판사
한겨레신문사 | 2002-07-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성장을 멈춘 시대, 새로운 소설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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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쏟아내고 싶을 만큼 슬펐던 게 언제쯤이었을까? 이젠 기억도 안나는 그 옛날의 습기를 눈시울에 되돌려놓은 책이다. 짧게 말해 불행한 동구 이야기다. 동구는 꾸욱 참고, 홀로 울고, 대신 욕 먹는다. 왜? 그저 가족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실제로 이 가족은 행복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도, 누가 그랬던가 흔치 않으면 귀해진다고, 그 짧은 시간을 떠올리며 그리고 그 때가 다시 찾아오길 바라며 바보 같이 희생만 하는 동구를 욕할 수 있을까. 결국 동구는 바보스러움의 정당성을 입증이라도 하듯 자기희생으로 다시 가족을 이어 놓는다.

내 어린 시절 살던 곳도 이 소설 주인공 동구가 살던 마을만큼 -아니 더 하면 더했지- 촌동네다. 그러다 보니 동구가 지나가는 발길 발길, 떠올리는 생각 하나 하나 내 몸 같이 느껴져서 동구가 기분좋으면 나도 좋고 슬프면 눈시울이 뜨듯해졌다. 살짝 감정을 뒤로 놓고 꼼꼼한 눈길로 보면 글쓴이의 썰풀이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와닿게 만드는 글.

아홉살박이의 고민, 세상을 보는 눈길, 첫사랑 젊은 선생님. 우리도 다 그 시절을 밟고서 어른이 되었으니 누구나 한번은 겪을 법한 어린 시절 사건은 언제나 독자의 머릿속에 뻗은 잔가지에 추억을 송글송글 맺게 해주며 소설 속 인물과 내가 하나됨을 맛보게 해준다. 태어난 세대는 중요치 않다. 살짝 틈은 느껴지겠지만 아홉살 아이를 90년대에 던져 놓은 들 70년대에 던져놓은 들 아이는 아이고 아이만의 생각이란 어떠한 공통점이 있으니 말이다.

이런 추억이 되살려놓은 아름다움 뒷면에 시대와 환경은 항상 시련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쓰린 기억은 더욱 아련하게 남는 법. 시련이 깊이를 숫자로 쓸 수 있다면 숫자가 클수록 기억에 오래 남고 이는 꼭 행복 숫자가 크면 클수록 기억에 오래 남음과 다름이 없다.

이런 시련과 행복이란 추억을 안고 우린 또 앞으로 나아간다. 언젠간 이 시각도 추억이 되리라 믿으며. 비록 좋은 추억일지 나쁜 추억일지 앞서 알아볼 수 없지만, 그런 건 우리가 이 시각을 추억으로 받아들일 시점에 가서라면 중요한 게 아니다. 아름답든 아프든 내 맘 깊이 남은 추억이다. 세상일이 지우개가 되어 녀석들이 들어앉은 자리를 지우려고 문질러대도 꿋꿋하고 끈기있고 처량하게 내 머릿속에 남으려 발버둥친, 사랑을 아낄 수 없는 추억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추억들이 머릿속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가려 할 때쯤 이런 좋은 책 한 권이 추억의 손아귀에 커다란 힘을 안겨준다. 놓지말라며, 더 버티며 추억으로 머물라며.




실종

저자
마이클 코넬리 지음
출판사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05-2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전화를 받은 순간, 그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했다!영미권 크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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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만난 날

사람이란 휘리릭하고, 또는 훌쩍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법이다. 크게 보면 지친 하루하루에서 벗어나 훌쩍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작게 보면 나와 같은 '짓'을 한다. 그 '짓'이란게 뭐 대단한 건 아니고 따뜻한 이야기만 찾아 읽던 것을 차가운 이야기를 다룬 책을 골라 읽음이다. 그런 딱히 상큼하지만은 않지만 아무튼 변화 또는 일탈. 그래서 수사물을 골랐고 눈에 띈게 이 책 '실종'이다.

줄거리

커다란 이야기는 이렇다. 획신적인 분자기술을 개발한 과학자 헨리 피어스. 전에 사귀던 여자친구와의 이별 덕에 새 집을 구하고 새 전화번호를 받아야 했다. 헌데 자꾸 이 번호로 '릴리'를 찾는 전화가 걸려온다. 아무래도 전에 그 여자가 이 번호를 받아 쓰다가 해지했는데 통신사에서 아직 처리를 마무리 짓지 않았나 싶다. 통신사에 전화해 빠른 조치를 취하면 그만인 일이지만 피어스는 이 '릴리'란 사람을 직접 찾아나서기로 한다. 과정에서 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범죄와 맞닥들인 피어스. 이정도로 해둬야 할 듯 싶다. 혹여나 이 글을 읽고 책을 찾은 사람이 스포당하는 일을 막기 위해.

나라면 어떨까?

다 읽고 난 다음에 문득 든 생각이 있다. 만약 피어스가 과학자가 아니었다면, 당장 나를 피어스 대신 끼워놓고 이야기가 돌아간다면? 과연 난 릴리를 찾으러 나설까? 아니 나선다고 정해놓고 진행해도 과연 정말 피어스가 찾은 결말에 도달할 수 있을까? 사실이 아니라 소설이길 정말 다행인 이야기다. 피어스의 수사과정에서 톱니바퀴 하나만 어긋났어도 결말은 카드로 쌓아놓은 성에 짓궂은 검지손가락을 들이밀 때처럼 와르르 무너졌을 터이다. 피어스는 조그마한 사건을 접한 뒤엔 항상 논리적 회로를 돌려 사건과 사건이 연결된 고리를 찾는다. 이게 과연 우리에게도 가능한 이야기인가 하는 말이다. 여러분과 내가 잘 알듯이 불가능이 답이겠지.

마치며

이 이야기는 폭력, 성매매 같은 도구로 우리 사회 뒷면을 보여준다. 누군가 그 뒷면을 이용해 꿍꿍이를 품으면 어떤 끔찍한 앞날이 펼쳐지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지은이가 의도한 이 부분보다 윗문단에서 쓴 '우리에겐 불가능한 수사'가 더 안타깝다. 내겐 저런 머리가 없을거란 생각이 더 안타깝다.

그런 의미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은 정답이었다. 읽는 우리는 결국 스토리텔링을 해주는 텍스트에 더 한몸이 되고 그 처지가 되어 읽히는 법이다. 그러니 일인칭 작가 시점으로 읽는 이가 주인공과 한몸이 되어 읽으면 곧 내가 그 어려운 뒤틀림과 실뭉치를 술술 풀어간다는 소리다. 이는 곧 비현실감을 불러 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반면에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면 난 그저 위에서 바라볼 뿐이다. 주인공이 해낸 훌륭한 풀이는 그 주인공이 뛰어난 거지 위에서 지켜보는 나완 직접 관계가 없다. 그래서 천재를 곁에서 바라보는 기분. 딱 그정도에서 읽는 이는 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 실제로 나도 그랬고. 일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수사물이 몇 작품이나 될까? 찾아보고 싶어진다. 



화이트 타이거

저자
아라빈드 아디가 지음
출판사
베가북스 | 2009-03-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세계 최고의 권위와 명성, 2008년도 부커상 수상작!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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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탈만한 책

우선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번에 주인공이 인도를 방문하는 중국 총리에게 뱉어내는 독백이자 편지글이다. 더군다나 번역서임에도 얼마나 '친서민적'인 말투인지 읽는대로 머리로 쏙쏙 들어오는 게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다. 의심가던 인터넷 강의를 결제했는데 재수좋게도 쏙쏙 쪽집게 강사를 만난 그런 느낌이다.

화이트 타이거

화이트 타이거란 흔치 않은, 그러니까 오리무리 중에서 홀로 튀는 백조같은 가치를 지닌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무대인 인도라는 정글 속에서 ㅡ다른 사람들은 닭장에 갇혀서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정글 속에서ㅡ 주인공은 홀로, 말하자면 계급 상승을 이뤄낸 화이트 타이거이다.

우리 삶에 남은 신카스트제도

사실 그렇다. 세상에 있는 어느 자유민주주의나라라도 결국 계급이 다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구분은 돈. 부자와 빈곤층 간에 있는 틈은 한 세대에선 쉽사리 뛰어 넘을 수 없을 만큼 크다. 이 틈을 죽을 각오로 뛰어넘은 사람만이 부자의 자유를 누린다. 주인공은 자기 주인을 죽임으로해서 이것을 얻었다. 주인공 어머니가 죽기 전에 하던 말처럼 정말 화이트 타이거의 '씨'가 있던 사람이다.

블랙 코미디

책은 매우 코믹한데 평을 너무 묵직하게 쓴 게 맘에 걸린다. 이 책은 아주 재밌습니다! 묵직하게 쓴 까닭이라고 치면 마냥 웃긴 TV 코미디 프로 같은 웃김은 아니라고 하고 싶다. 등장인물 말투가 아주 서민적인데다 옮긴이가 지나친 욕설도 있는 그대로 번역해준 덕분에 정말 '술술 읽힌다' 싶다. 하지만 이런 코미디 뒷면엔 인도 빈곤층의 말도 못하는 삶이 보인다. 승진하려 손바닥 비비는 짓이 옆에서 맞장구 쳐주거나 커피를 타오거나 기껏 그게 다인 우리완 다르다. 제 3세계 사람들은 아직도 주인을 모시는 '종'이란 개념 속에(책에서 말하자면 닭장 속에)살고 있다. 게다가 문제는 다들 이 닭장을 부수려 하지도 않는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코믹하게 풀어낸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 세상은 이대로 옳은가?를 자문하게 만드는 책이다.



포르토벨로의 마녀

저자
파울로 코엘료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7-10-1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내 안에 숨겨진 마녀를 일깨우라! 연금술사 작가, 코엘료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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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란...

1) 작가는 항상 안경을 걸치고, 절대 머리는 빗는 법이 없다. 늘 화를 내거나 우울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는 술집에서 역시나 헝컬어진 머리칼에 안경을 걸친 다른 작가들과 격론을 벌이는 데 일생을 바친다. 작가는 매우 '심오한'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리고 언제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치며, 가장 최근에 출간된 자신의 책을 몹시도 혐오한다.

2) 작가는 자기 세대로부터 절대 이해받아서는 안 될 책임과 이무를 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따분한 시대에 태어났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동시대인들에게서 이해받는 건 천재로 간주될 기회를 송두리째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확신한다. 작가는 자신이 쓴 문장을 끊임없이 다듬고 수정한다.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산천 개 내외인데, 진정한 작가는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제외하고도 사전에는 아직 십팔만 구천 개의 단어들이 남아 있는데다,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잖은가.

3) 작가의 말을 이해하는 건 동료 작가들뿐이다.그럼에도 작가는 남몰래 동료를 경멸한다. 그들은 결국 문학사에 수세기 동안 공석으로 남아 있는 영광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경쟁자들이니까. 작가는 '가장 난해한 책'이라는 영예를 안기 위해 동료들과 경쟁한다. 이 싸움에서 승자는 가장 읽기 어려운 책을 쓰는데 성공한 사람이다.

4) 작가라는 사람은 기호학, 인식론, 신구체주의 같은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명사에 조예가 깊다. 누군가에게 겁을 주고 싶으면 이런 말을 들먹이면 된다. "아인슈타인은 바보야." 혹은 "톨스토이는 부르주아의 광대였어". 그 말을 들은 상대는 아니꼬워하면서도, 그 자리를 뜨자마자 상대성이론은 엉터리이고 톨스토이는 러시아 귀족사회의 옹호자였다고 떠벌리게 될 것이다.

5) 작가는 여자를 유혹하고 싶을 때마다 냅킨에 시 한 편을 써서 건네며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작가입니다." 언제나 통하는 방법이다.

6) 작가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문학비평을 한다. 그는 비평가로서 동료들의 작품에 후한 점수를 준다. 그러나 그가 쓴 평론은 반은 외국 작가의 인용구로, 나머지 반은 '인식론적 단락' 이니 '융화된 2차원적 삶의 비전' 같은 표현 따위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감탄할 것이다. '참 똑똑한 사람이야!' 하지만 막상 책을 사기는 꺼린다. 인식론적 단락 앞에서 쩔쩔매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7) 작가는 요즘 무슨 책을 읽느냐는 질문에 늘 남들이 듣도 보도 못한 제목을 댄다.

8) 작가와 그 동료들에게 한결같은 감동을 안겨주는 책은 세상에 단 한 권뿐이다. 바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이 작품을 깎아내리는 작가는 없다. 하지만 책 내용을 물으면 횡설수설한다. 정말로 그걸 읽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의 프롤로그에서



포르토벨로의 마녀에는 수많은 '벗어남'이 담겨 있다. 

첫째로, 주제다. 그동안 '신'에 담겨진 성별은 남성성이었다. 가부장적 전통을 계승한 이들은 전능한 지배권을 상징하는 존재다. 그러나 포르토벨로의 마녀에 나오는 신은 여성이다. 그리스 신화 따위에서 제우스의 성놀이 상대일 뿐이고 서로 질투싸움이나 하던 아낙들, 철저한 남성 중심 사고가 빚어낸 왜곡의 피해자들, 그녀들이 이제 메인무대로 오른다. 또한 기존의 남성신 중심 스토리가 권위적이며 절대적인 심상을 드러냈다면, 대지의 여신 가이아로 대변되는 여성신의 이미지는 곧 모두의 어미, 끌어안고 다독이며 격려하는 신으로 드러난다.

둘째의 벗어남은 바로 종교이다. 한동안 '덴 브라운' 소설을 위시로 하여 반기독교 픽션, 팩션이 쏟아져 나왔다. 허나 이 또한 최근의 일이고 전통적으로 종교, 특히 크리스트교는 긍정적인 묘사되었다. 다시 말해 종교는 숭배할 대상이었지 비판의 대상은 아니었다. 여기서 코엘료는 다른 길을 걷는다. 아테나를 모함하고 소송까지 아끼지 않는 인물로 꽉막힌 목사를 설정하는 것 이를 통해 기존 종교들이 갖은 폐쇄성을 비판하는 노림수를 성실히 수행한다. 더불어 미디어도 아테나와 그 주위에 모인 사람들을 왜곡하고 과장함으로써 이 꽉막힌 목사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셋째로, '스승 패턴'을 때려부수는 시각이다. 기존 소설 플롯의 스승은 가르치는 자, 제자는 배우는 자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이를 해체한다. 코엘료는 스승과 제자를 모두 배우는 자로 설정한다. 동양의 청출어람과도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권위, 특히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의 역사 깊은 갑을 관계. 이 틀을 파울로 코엘료는 보란 듯이 벗어난다.

마지막으로, 화자 시점이다. 이 책은 마치 다큐멘터리 한 편을 글로 옮겼으면 이랬으리라 싶을 만큼 특이한 시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아테나를 둘러싼 각 인물들이 독백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 이런 식의 텍스트를 접하면 독자는 어떤 효과를 누릴 수 있을까. 우선 객관적인 사실관계가 큰 틀로 잡힌다. 그러나 개인의 동일한 사건에 대한 묘사는 제가끔 다를 수 있다. 이 점에서 코엘료는 "손 안 대고 코 풀기" 방법을 동원한다. 기존의 전지적 시점이나 1인칭 시점 소설은 어떤 형식으로든 작가가 개입하여 각 인물의 성격을 묘사해야 한다. 전지적 시점에서는 직접적으로, 1인칭 시점에서는 주인공의 감상이나 대화체로써. 그러나 인터뷰 형식을 차용하면 이 캐릭터 파악 작업이 독자의 손으로 넘어온다. 내려놓기와 벗어나기는 이음유의어이다.

어느 방면에서든 "발군"이라는 호칭을 수식어로 받는 전문가는 제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파울로 코엘료 또한 이에 속하는 저자이다. 그리고 이는 기존 형식을 벗어나 독자와의 친근감을 형성, 적절한 고발성을 띠며 건네주는 작은 속 시원함으로 전해진다. 파울로 코엘료의 벗어남은(脫) 독자들을 끌어들이는(集) 아이러니한 벗어남이다.



ぬるい眠り

저자
江國香織 지음
출판사
新潮文庫 | 2007-03-01 출간
카테고리
문고(포켓북)
책소개
ミリオンセラ-『きらきらひかる』の十年後を描く作品などを含む全9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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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에쿠니 카오리라고밖에

어쩜 이리도 이야기 하나 하나가 따뜻한지, 사람을 위로하는 글, 딱 그런 글을 쓰는 사람. 일본문학은 꼭 원서를 사서 읽기 때문에 번역으로 때탄 글에서도 자유로왔다. 덕분에 이야기가 큰 스웨터라면 실오라기 하나 하나까지 손 보아둔 작가의 여성스러움이 듬뿍 넘치는 단편집이다.

무엇보다 첫 이야기가 마음을 확 잡아 끌었다. love me tender라는 이야기. 설마 엘비스 프레슬리의 그 노래는 아니겠지 싶었다. 허나 역시 그 노래였다는 점에 약간의 배신감. 그 흔해빠진 노래를 가지고도 비단을 엮어내는 작가. 그게 에쿠니 카오리 아니던가? 후회는 역시 없었다.

'먹히는' 작가

이밖에 이 책 속 다른 단편들에도 모양은 다르지만 결국 사람관계, 사랑으로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있을 법한 그러면서도 살짝은 특별한 이야기. 이 점 때문에 에쿠리 카오리가 '먹히는' 것이다. 독자는 이런 책을 원한다. 우리는 평범한 우리 삶에서 살짝 뒤틀어진 일탈을 꿈꾼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가장 흔한 감정인 사랑을 그 도구로 다루기에 우리는 빠져들 수밖에 없다.


 


달콤한 목요일

저자
존 스타인벡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3-0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존 스타인벡이 창조한 사랑스런 인물들의 유쾌하고 훈훈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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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수요일, 그리고 휴일이 기대되는 금요일, 그 사이에 있는 달콤한 목요일.

한 바닷가 마을에서 일어나는 닥(주인공) 행복하게 만들기. 한 땐 그 마을에서 반쯤 살아있는 종교라고까지 해도 될 만큼 모든 면에서 신뢰받던 닥. 이 사람이 전쟁이 끝난 뒤에 달라져 돌아왔다. 예전 같지 않게 삶을 고통스럽게 본다. 이를 참다 못한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의 리더이자 쉼터인 닥을 다시 행복하게 하기 위해 꿍꿍이를 꾀하는데.

이들에게 수요일까지가 힘들어하던 닥을 상징한다면 목요일은 닥을 행복하게 만들기위한 '달콤한' 계획을 직접 실행하는 날. 정작 당사자인 닥은 그 과정을 생각지도 못했고 억지로 당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남이 날 행복하게 하기 위해 날 속이는 꿍꿍이. 기쁜걸까? 게림칙한걸까? 이 계획이 똑딱 들어맞을까 아니면 폭삭 무너질까? 그래서 닥이 다시 행복해질까 여전히 불행할까? 물음이 끊임없다.

읽어가면 점점 더 뒷이야기가 궁금해 참을 수 없는 재미난 이야기였다. 그리고 겨울날 몇 달 만에 만난 친구들과 따듯한 정종을 마시고 헤어진 후 택시안에서 다시 그 술자리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따듯함. 그런 게 있던 책이다. 달콤한 목요일은 다분히 스타인벡 답지 않은 책이라 한다. 다른 작품들은 좀 더 무겁거나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그런 책들이란다. 좋습니다, 다음에는 다른 분위기로 다시 뵙지요.

 


세계의 끝 여자친구

저자
김연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7-2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이상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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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바깥 얘기

요즘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닌 걸 하나 들자면 포장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과대포장. 마트에 가서 가위나, 자동차 전구나 뭐 그런 것들을 살 때면 아주 딱딱한 투명 플라스틱 포장과 만난다. 이게 보기에는 참 좋아보여도 내용물을 손에 쥐기까지는 참말로 불편하기 짝기 없다. 때때론 가위 포장을 뜯으려고 가위로 포장을 잘라야 하는, 누굴 위해 누가 널 뜯고 있는지 모르겠다 싶은 씁쓸함마저 느낀다.

책 속에선?

내게 이 책은 과대포장된 사탕과 같았다. 그 이야기가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산 역사라고 할지라도 그 고귀한 이야기를 세상과 잇는 단 하나뿐인 수단을 지나치게 다루면 읽는 사람은 고귀함을 느끼기 전에 지친다. 수식에 지치고 포장에 지쳐서.

단편들로만 이루어진 책이다보니 긴 플롯이 나오기 어려운 건 당연하다 본다. 그래도 짧아도 너무 짧다. 마지막 달로 간 코미디언이 그나마 페이지를 많이 잡아먹어서 흐름이 있고 인물이 이동하는 장면도 많았다. 하지만 그 앞에 나온 단편들은 정말 플롯이 짧다. 플롯보다는 인물이 생각하는 세계, 철학, 자기만의 시각을 나타내는 일종의 수식이 페이지를 많이 차지하다보니 당연한 이야기다. 그 수식들은 플롯과는 크게 상관없이 툭툭 튀어나왔고 따로 둥둥 떠다니는 비눗방울 같이 어색하기만 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우연한 여행자

저자
앤 타일러 지음
출판사
예담 | 2007-07-1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989년 종이시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앤 타일러의 대표작.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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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메이컨이란 남편은 모든 일을 베틀에서 옷짜듯 꼼꼼히 짜야한다. 항상 같은 식당에서 밥먹길 원할 만큼 정해놓은 틀에 산다. 그 틀에서 벗어날 때마다 편하지 않고, 아니 틀에서 벗어나지조차 않는다. 반면 아내 세라는 여러 식당에서 밥을 즐기길 바라고 취미로는 조각을 하는 유동성 있는 여자다. 이 부부는 아들이 있었는데 살인사건으로 잃고 만다. 그일이 도화선에 불을 붙여 그렇지 않아도 휘청거리던 부부사이를 별거로 이끌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이 거리감이 소설 안에 시작부터 끝까지 흐른다. 물론 중간에 뮤리엘이란 여자가 튀어나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자칫 지루할 뻔한 플룻을 재밌게 엮어내기도 했다. 그렇게 책을 반쯤 읽었을 때까지 철썩같이 덮어두고 믿었다. 뮤리엘은 그런 감초라고 말이다. 당장 입에는 쓰지만(읽는 책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눈에는 따갑지만) 결국에 가서는 세라와 메이컨 사이를 더더욱 단단히 맺어줄 그런 인물인줄로만. 하지만 이게 웬걸. 메이컨은 뮤리엘을 택한다. 내가 읽으며 기껏 촉매제로, 아니 큰 의미를 준다고 해도 둘이 더욱 애절하게 해주는 그런 여자로 여겼던 여자를 작가는 그 누구보다 뮤리엘을 무겁게 다뤘겠다 싶었다. 비록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사람이 메이컨일지라도 말이다.

변화라는 코드를 잡으면 흐름이 보인다

어찌 보면 사랑을 다뤘다고 할 수 있고 어찌 보면 결혼생활을 다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정의한 이 소설은 '변화'다. 한 사람 한 사람 변화를 겪고 그 변화가 위와 같은 결과를 낳았다. 자세히 보자면 굳은 메이컨과 흐르는 세라 사이에 있는 갈등이 별거를 불렀다. 그렇게 떨어져 있는 사이 메이컨에게 나타난 폭탄과 같은 뮤리엘이 메이컨을 변하게 만든다. 이 변화가 가장 크다. 그리고 세라는 별거를 거쳐 메이컨과 함께하던 때엔 못했던 자기 성격을 따라 '마음껏 흘러보기'를 즐긴다. 다른 남자도 만나봤고, 밥먹는 일 하나에도 틀에 박힐 일이 없었고, 좋아하던 조각도 마음껏 배워보았다. 하지만 결국 메이컨을 그리워하고 자기를 변화시켰다. 메이컨에 맞추기로 흐름을 멈추었다. 그러나 메이컨 곁으로 돌아갔을 땐 이미 늦었다. 메이컨은 뮤리엘을 만나 흐르기 시작했다. 몸은 세라 곁에 돌아왔지만 흐름은 멈출 줄을 몰랐다. 기껏 멈추었더니 남편은 반대로 흐르고 이 얼마나 억울한가.

영원히 삐걱 거려야 하는, 크기 안맞는 톱니바퀴 같은 두 사람 관계

슬픈 연극을 한편 본듯 한 마음이다. 작은 변화 하나 하나들이 잔물결을 만들었다. 이것이 뭉쳐 파도가 되고 세라로 가야할 뱃길을 뮤리엘로 이끈 기분. 그리고 그 작은 변화란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두 사람의 손에 놓인 일이 아니라 컨트롤할 수 없는 사고ㅡ아들이 죽은 일ㅡ다. 정작 당사자들은 의도하지도 않은 사고로 변했다. 삶은 그런 걸까? 지금까지 나라는 커다란 퍼즐판에 그런 내 의도완 상관없이 날 바꾼 사고들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그리고 그때마다 난 인식했나? 문득 덧없음이 스친다. 의도하지 않은 변화는 결과가 좋든 아니든 슬픈 심상으로 남는다. 우연한 여행자는 바로 그것을 잡아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