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애거서크리스티 추리문학베스트 1)

저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출판사
해문출판사 | 2002-05-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 장편소설. 크리스티의 전작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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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8명의 사람들이 인디언 섬으로 초대 받는다. 이 다양한 면면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살인을 저질렀으나 법의 헛점을 이용해 용케 피해갔다는 점. 그리고 고립된 이 섬에서 그들을 향한 심판이 내려온다.

 

앞서 말해두고 싶은 것은 미드 로스트나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 배틀로얄식의 플롯이라는 점이다. ㅡ이것이 참 재밌는데 이 책이 1939년 작이다 보니 우리에게 는 더 익숙한 위의 세 작품과 닮은 플롯으로 취급하는 내가 아이러니이다. 사실은 반대겠지.ㅡ 귓구멍 안쪽의 털까지 곤두세우며 읽게되는 추리물이다.

 

각각 인물의 배경설정이 뛰어나다. 보통 소설이란 주인공과 주변인물의 과거 혹은 배경설정으로 많아야 4가지 스토리를 깔아두고 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에거서 크리스티는 훨씬 꼼꼼한 작가이다. 배경이 배경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의 사건ㅡ이 책에서는 그 인물의 죽음이겠지ㅡ과 연루되는 치밀함. 가히 추리소설의 진수이며 우리는 이 때문에 추리소설에 열광한다. 치밀함.

 

밀실살인 등으로 대표되는 의문사는 추리소설을 대변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딱히 이 작품의 흠으로 삼기에는 시대배경 탓이 더 크지만, 우리는 이미 이 작품 이후로 쏟아져 나온 추리 소설 및 영상을 겪었다. 그리고 후생가외격으로 늦게 태어난 만큼 더욱 긴박감 넘치는 작품들이었다. 때문에 과거 작인 이 작품의 긴박감은 살짝 느슨하게까지 느껴진다. 예를 들어 해안에서 떠밀려 오던 시체가 암스트롱이었던 부분은 너무 당연하기까지 했다.

 

두 번째 문단에서도 밝혔듯 시대가 만든 간극이 주는 어색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번역을 다시 하지 않는 한. 그렇다고 하기엔 이 책이 만들어 진 때가 2006년 이라 번역도 그 즈음에 이루어졌을 터인데, 그렇다고 치면 시대가 주는 어색함이라 부르기는 조금 그렇다. 다만 번역의 맛깔이 살아나지 않았다 정도로 마무리 짓고 싶다. 

 

당시에는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에 와서 보기에는 그렇게 큰 임팩트 있는 소설은 아니다.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저자
에쿠니 가오리 지음
출판사
소담출판사 | 2004-09-1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청아한 문체와 세련된 감성화법으로 사랑받는 일본의 3대 여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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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팬임을 숨기지 않겠다. 에쿠니 카오리의 에세이 아니 정확히 말해서 결혼 에세이. 오랜만에 이 작가만의 맛을 느끼려 집어든 책은 생각 밖으로 다른 맛이 났다. 이 여자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이 여자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이 여자 그 자체의 맛이 났다. 원하던 맛은 아니었지만 딱히 맛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맛있지도 않고.

 

머리로는 이해 할 수 없는 남편의 게으름을 묘사하여 읽는이로 하여금 '결혼이란 이렇게 불편한 것' 이란 마음을 심어주다가도, 남편의 등을 꼬옥 감싸고 잠을 자면 행복하다는 등 결혼의 진미를 이야기 하기도 한다. 책을 덮고도 아직 모르겠다. 이 여자가 결혼을 바라보는 스탠스는 무엇인가. 스탠스 자체가 없다고 봐도 좋을지, 그렇다고 하기엔 결혼에 관한 많은 것을 정의하고 그 정의엔 일관성이 없다. 그래서 든 생각인데 때로는 답이 없음이 답이 아닐까 한다. 이 여자의 결혼생활이 곧 그렇고, 세상의 모든 결혼이 그렇지 않을까.


기혼자ㅡ특히 기혼 여성ㅡ에게 공감을 많이 받을 글이다. 에쿠니 카오리의 대중성은 말할것도 없으니 제외하고도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나와는 정말 들어맞지 않는 책이었다. 미혼 남성에 독신주의자이다보니.

 

특히 경악할 수밖에 없던 챕터 '어리광에 대하여'. 으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저 어리광이다. 내가 부리는 것도 누군가 부리는 것도 정말 싫다. 헌데 에쿠니 카오리는 찬미를 하고 있지 않은가?! 오 세상에 좋아하는 작가로 치면 손에 꼽는 사람인데 이렇게 엇나가는 부분도 있었다니, 괜한 실망감에 휩싸인다. 내가 남편도 아닌데.

 

 또 에쿠니 카오리의 마법에 낚였나보다. 기껏 140페이지 남짓하는 단편에 별생각을 다하고 마무리지어지는군. 사람 생각하게 하는 데는 뭐 있다니까 정말.

 



사랑을 찾아 돌아오다

저자
기욤 뮈소 지음
출판사
밝은세상 | 2008-11-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미스터리 속에 인생의 깊은 의미를 녹여낸 기욤 뮈소의 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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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도서관 대출 동향을 보자면 기욤 뮈소 책이 퍽 잘나가는 편이다. 분명 기존 연애소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터이다. 독자가 선택한 책. 그것만으로 읽을 가치는 있다.

 

주인공 에단은 첫날 여러 사건을 겪고 죽음으로써 그 날을 마무리 하는데 눈을 떠보면 다시 그날의 아침이 돌아와 있다. 철저히 나비효과식 플롯이다. 나비효과라는 영화가 대유행한 뒤라 그럴까? 플롯이 식상하다는 소리를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소설이 발명경연대회도 아니고 창의력만으로 평가하는 분야도 아니기 때문에 도시락 싸들고 질타해댈 부분은 아니다.

 

이 소설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몰입력이다. 나비효과를 차용한 점에서 생각해보면 분명 이야기는 오늘을 만든 과거로 집중될 것이다. 오늘이란 퍼즐을 풀지 못하니까 자꾸 같은 날 아침으로 리셋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퍼즐의 답은 과거에 있다. 자의로 한 일이든 타의로 한 일이든 그 과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독자는 이 추리 비슷한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된다. 에단과 함께 '이것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저것 때문?' 하며 추리를 펼치게 된다. 추리는 항상 true or false식 결말을 낳는다. 기욤 뮈소는 이야기를 읽어가며  에단, 혹은 나의 추리가 들어 맞았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는 독자의 심리를 적당히 꿰뚫었다.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꿈만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과거의 과오를 털어내고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다니. 다만 결국 과오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꼴이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에단의 경우에는 부와 명성을 찾아 '떠남', 그 떠남이 곧 나비의 날개짓이었다. 내 인생에서 그 날개짓이라는 격이 어울리는 행위나 사건, 그것을 파악하고 피하는 힘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인생은 그렇지 않고 불완전하기에 랜덤, 제비뽑기 같은 재미가 있는 것이다. 덕분에 이런 재미난 이야기도 나오는 거겠지.



내 심장을 쏴라

저자
정유정 지음
출판사
은행나무 | 2009-05-2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새로운 인생을 향해 탈출을 꿈꾸는 두 청년의 분투기!20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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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는 심리를 주된 이야깃거리로 삼은 정신병원활극이다. 
작가가 간호대출신이며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직접 정신병원에서 취재를 했다는 점에서 그 디테일은 더욱 살아난다. 듣도 보도 못한 병명과 전문용어가 가끔 튀어나오지만 정말 가끔이라 가독성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무엇보다 작가의 썰풀이 능력이 빛난다. 인위적 복선장치를 깔지 않고도 사건 간의 체인이 구리스 바른 듯 부드럽다. 이 부드러움 때문에 딱히 지루하지도 않으며 툭툭 던져나오는 블랙코미디가 쉽사리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덕분에 새벽잠을 자야했다. 침대머리에서 잡으면 놓기가 어려워서.


폭이 넓다. 병원 안에서 벌어지는 자유를 향한 갈망과 통제, 병원 밖에서 존재하던 환자들마다의 사연, 배경에 상관없는 인물의 내적 갈등. 이 넓은 스펙트럼의 이야기를 340페이지 남짓한 종이에 우겨넣었음에도 우겨넣은 티는 나지 않는 훌륭한 책이다.

 

트라우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  특정 사건이나 외상 후에 정신적 스트레스로 남아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인류의 운명과도 같은 적. 내 심장을 쏴라는 트라우마를 멋지게 극복해낸 옵티미즘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극복과정에서 한 편의 버디무비 같은 통쾌함이 있었다. 어찌 보면 승민이 비바람 치는 하늘을 활공하던 행글라이더처럼. 수명이 당당하게 퇴원하는 그 순간처럼. 소설에 한정해서는 지극히 해피엔딩을 선호하는 나는 웃음을 띄며 책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표지 일러스트를 보고 흠칫했다. 낯이 익다. 이것은 이기호의 <사과는 잘해요>에서 봤던 그 그림체가 아니던가?! 역시나 책장에서 사과는 잘해요를 찾아보니 내 심장을 쏴라와 마찬가지로 오정택이란 분이 그리셨다. 사과는 잘해요도 빼어난 작품이었는데 오정택 씨는 좋은 글만 찾아서 그려주기가 방침이라도 되는가? 이거 작가가 아니라 일러스트레이터 보고 책 고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동경만경

저자
요시다 슈이치 지음
출판사
은행나무 | 2004-09-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장편소설. 지하철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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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이야기를 만난 건 2004년이었다. 그 때 한창 일본 드라마에 빠져있었는데 신작으로 동경만경이라는 드라마가 떴고 그게 우리의 처음이었다. 신나게 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카마 유키에라는 일본 국민배우가 주연하고 남주인공은 약간 올챙이두겁을 뒤집어쓴 인상인, 미남배우를 평가하는 한일의 가깝지만 먼 기준을 느꼈던 드라마였다. 그리고 삼일 전부터 책으로 다시 만나 원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선 드라마는 원작이 꽤나 각색했다. 시대배경으로 한창 한류열풍이 불던 때이기에 여자 주인공은 재일한국인 2세로 나온다. 곧 재일교포와 일본인들 사이의 마찰이 등장한다는 소리다. 또한 남자 주인공의 원작은 선박화물을 다루는 노동자에서 끝나는 데 반해 드라마에서는 일본전통서예 아티스트를 꿈꾸는 노동자이다. 플롯도 차이가 난다. 드라마는 사랑, 인종, 꿈까지 토털패키지를 담는데 원작은 연애소설 그 본질에 가깝다. 총평을 하자면 드라마는 토털패키지를 잡으려다 죄다 놓친 망작에 가깝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고는 하나 내 기억에 이렇게 안 남을 정도면 분명 좋은 드라마는 아니었을 게다. 따라서 원작에 손을 들어준다.

 

 이제 본격 책 이야기를 해보아야겠다. 흔히 세상은 연애라는 심상을 이야기 할 때 화성남 금성녀에서처럼 서로 다른 이해와 강조 포인트를 역설하기 바쁘다. 남녀 사이의 건널 수 없는 무언가를 강조한다. 마치 남녀를 이종異種 다루듯 한다. 꽤나 논쟁과 화두를 불러모을 떡밥임이 분명하긴 한가 보다. 동경만경도 예외라고 볼 수는 없다. 갈등의 단계가 한창인 시점에서는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대화, 오해로 인한 어긋남 등을 등장시키고 틈을 고조시킨다. 그런 점에서 시나가와 여자, 오다이바 남자. 가깝지만 분명 분리된 배경장치. 이것을 적절하게 활용한 작가의 솜씨는 귀신같았다. 이야기는 이곳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작가는 류스케를 통해 이 배경을 초월하려는 마지막 고백이자 시도를 한다. 차이를 머리로 이해하는 수준이 아니라 초월의 경지인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솜씨 좋게 빚어냈다. 오랜만에 만난 가슴벅차게 깔끔한 결말이다.

 

요전에 동작가의 작품 악인을 읽었다. 아마 이 북로그에도 남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시다 슈이치의 글은 차갑다. 배경묘사에는 어떠한 심리 반영이나 복선 따위를 찾아보기 어려운 절제가 느껴진다. 차라리 필요없지 않을까하는 배경묘사까지 있다. ㅡ그렇다고 이기호의 사과는 잘해요 같은 극초박형절제는 아니다.ㅡ 따라서 이런 연애소설보다는 악인 같은 글이 본재주 펼치고 훨훨 날아가는 글이라 여겼다. 내 얕은 안목일 뿐이었다. 억지로 배경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뻔뻔하게 보이는 작가들보다 훨씬 담백한 말투일 뿐이었고 싫지 않다.

 

류스케의 멋지지만 그다지 포장하지 않은 대사. 멋진 대사는 저렇게 날려야 하나 싶다. 여심을 사로잡고 여운을 남기려면 저정도는 되어야지. 시나가와 부두에서 오다이바까지 대충 1Km는 될텐데, 아 이거 나도 수영 배워야 되나?



노는 인간

저자
구경미 지음
출판사
열림원 | 2005-11-1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동백여관에 들다가 당선된 이후 꾸준히 단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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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턱대고 길거리로 나가 '당신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하고 설문조사를 시작하면 그 답이 바다를 이루는 물방울의 개수만큼이나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싶다. 가족, 사랑, 돈. 하지만 질문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같은 물음을 하였을 때는 어떤가? 불쑥 튀어나올 만한 확고한 명사가 하나 있냐는 말이다. 이 소설은 그 의미를 찾아 떠나는 환상이다.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환상임에 무게를 두고 싶다.

 

각 단편들 속 주인공인 '나'는 끊임없는 회의와 마주친다. A를 만족시켜 풀어보려 하면 B라는 문제가 새로 다가온다. C와 D가 기다리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없고. 이렇듯 찾으면 찾을수록 안개속으로 숨어버리고, 단순화하면 할수록 복잡해진다. 때론 인물이 그 회의 때문에 삶의 마지막을 고하기도 해 읽는이에게 허탈감을 넘어선 박탈감을 안긴다.

 

허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작가의 의도다. 작가는 과연 허무들만을 보여주기 위해 글을 썼을까? 이 물음의 답과 첫문단에서 환상이라 강조함은 맥락을 같이 한다. 각 단편의 배경은 자칫보면 현실의 판박이로 보일지 모르나 어느새 전개는 정신과 몽상으로 가득찬 인물을 그려낸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 환상이라는 것은 곧 현실의 반증이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굵다란 역설은 아닐까? 과대해석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소설 속 노는 인간들은 현실에서 놀 수 없는 인간들을 떠오르게 하며, 그들이 놀면 놀수록 현실 속 삶은 더 내달리고 있음을 가르키는 게 아닐지 넘겨 짚어본다.

 



인간 종말 리포트. 1

저자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8-11-2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인간의 과욕과 허영이 불러온 멸망의 역사! 캐나다를 대표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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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읽은 디지털 네이티브가 희망찬 미래를 내다보는 책이었기에 이 책 이름이 눈에 띄었는지 모르겠다. 교양서와 소설로 형식은 다르나 미래라는 같은 주제를 가지고 낙관론과 비관론으로 갈리는 이 흔해빠지긴 했으나 매력 넘치는 주제.

  이 소설은 이종(異種)동물간에 유전자를 조합해 씨가 섞인 동물이 만들어질 것이며 더더욱 포악하고 무서울 거라 내다본다. 인간개조도 이루어져 공격, 범죄 성향 따위를 제거하고 발정기가 따로 있는 인간이라 부르기 뭐한 존재들이 태어난다. 이러한 파괴와도 같은 개조가 단 한 사람 천재 크레이크에게서 말미암았음을 강조한다. 문제는 그 천재의 도덕이 옳았냐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도덕이긴 하였나 하는 물음이다. 조물주라도 된 양 스스로 파괴주가 된 크레이크, 모든 물질문명을 파괴하고 자기가 만든 개조인간들인 크레이커들만 남겨놓고 떠난 그 행위는 곱게보면 대자연을 위한 '리셋'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또한 이 천재가 인간 종말을 불러 올 수 있게 만든 시스템도 문제다. 옮긴이가 책 끝머리에 남긴 글에도 나오듯 소설 속에 정부라는 심상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거대 조합들만 등장하고 이것들이 주로 회사인 걸로 보아 자본에 먹힌 권력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와 사랑과 관용보다 돈이 앞서는 사회. 이 사회가 결국 크레이크같은 변종천재를 낳았다는 역설일 수도 있다. 

 

농담,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상당히 만족했던 민음사의 책이다. 다만 앞의 두 책과는 달리 번역이 아쉽다.



사과는 잘해요

저자
이기호 지음
출판사
현대문학 | 2009-11-1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어수룩하고 모자란 두 청년의 사과 대행업!재기발랄한 젊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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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힘들어 웃음이 나오는 상황. 그렇듯 강한 감정은 되레 역방향의 표현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이 책은 심리묘사를 될 수 있는데까지 아끼며 오직 상황을 써내려간다. 미사여구라고 부를 만한 구석은 단 한 군데도 찾질 못했다. 대단하다. 글쓰는 이도 사람이고 사람이 글을 쓰는데 감정을 숨기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가끔 몇몇 글은 화려한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기 마련인데 그런 욕심을 이렇게까지 참을 수 있나 싶다. 문학평론가는 이것을 '탈권위'라고 표현했다. 글쓴이가 감정표현이란 권력을 손에서 놓고 읽는이에게 맡긴다니 엉덩이가 들썩거릴만큼 자유롭지 않은가? 적어도 내가 읽은 소설 중에 이런 소설은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짐짐하지가 않다는 점이 놀랄 만하다. 묘사를 자제하고 오로지 상황설명만으로 이끌어가는데도 책을 읽는 동안 감정이 꿈틀거린다. 이 읽는이에게 맡겨둠이 스티븐킹의 The mist 같이 결말을 흐리는 독자개입과는 아주 딴판이다. 이미 글쓴이가 다 내던져준 이야기에 결말만 상상하라는 것이 기존 독자 개입이었다면 이기호의 새로운 시스템은 골격만 주어주고 살은 읽는이가 붙여보라는 문체이다. 텁텁할 것 같았던 건빵을 베어물었더니 가득 사과잼이 들어있는 그런 예상 못한 즐거움이다.

 

소재 선택도 빛난다. "사과는 잘해요." 누군가 주인공과 친구에게 뭘 잘하냐 물었을 때 나온 대답이다. 다른 건 다 손방이라도 사과 하나는 끝내주게 하는 그들. 사과가 부족하다 싶으면 잘못을 만들어서라도 사과해야 직성이 풀리는 두 사내의 유쾌씁쓸 사과대행비즈니스. 기대하셔도 좋다.

 



스켈레톤 크루

저자
조영학 지음
출판사
황금가지 | 2006-05-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공포 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의 두 번째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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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공포란 그 원래 의미대로 무서움보다는 짜증스러움에 더 가깝다. 공포영화를 보면 갑작스런 화면이나 소리에 헉헉 놀래긴 하지만 무서움보다는 왜 날 놀래켜! 하는 짜증스러움이 앞선다. 보고 와서 침대에 드러누우면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내 발을 누가 채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야 당연할텐데, 심장에서 피를 쪽 뽑아내듯 쥐어짜는 공포를 느낀 적이 딱히 없음은 스스로에게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없던 감정 하나를 살려내 보고자 공포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님을 만나기로 했고 영화로도 평이 좋았던 The mist가 담긴 스켈레톤 크루를 골랐다.

 

이야기는 이렇다. 허리케인이 들이 닥친 뒤 정체 모를 안개가 온마을을 덮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안개는 운전시야를 방해하는 정도의 잠초롬한 날씨에 무시해도 될 만큼 잗다랗게 끼인 안개가 아니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이 안개는 풍경을 한 입 한 입 잠식하더니 이윽고 주인공과 마을사람 약 80명 정도가 대형슈퍼마켓에 모였을 때 공포로 돌변한다.

 

공포소설답게 전개가 발빠르다. 또한 공포가 대기중에 깔린 마당에도 실타래처럼 얽힌 인물들의 심리가 이야기 자칫 짐짐하게 흐르거나 획일화된 플롯이 되지 않도록 막아준다. 배경장치로는 밀실공포, 심리장치로는 서로 엇갈리는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배합하여 넣는 모습이 거장답다.

 

 다만 아쉬운 점은 역시 결말이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알프레드 히치콕식 결말을 언급했는데 실제로도 그렇게 끝날 줄이야. 또한 이러한 결말은 독자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놔둔다는 데 의미가 있는데 딱히 뒷내용이 끌리지가 않는다는 점도 이 결말이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깊게 한다. 해피든 배드든 좋으니 결말을 달라는 나같은 독자에겐 김빠진 맥주 같은 결말이니 미리 대비하시라. 반대로 말하면 결말까지 치닫는데는 그만큼 고농축 공포를 뿜어댔다고도 할 수 있겠지. 어찌되었든 결말을 빼놓고 본다면 충분히 재밌는 소설이다. 다만 터미네이터 3의 결말을 보고 다신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할 만큼이나 결말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은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호밀밭의 파수꾼

저자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9-01-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물질적 가치만 내세우는 세상의 비인간성에 염증을 느끼며 반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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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유명한, 또 인정받은 이란 형용사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여럿에게 그렇게 불려진다 한들 내가 접하고 그렇게 느끼지 않으면 내게는 별거 아닌 것뿐이다. 그래서 특별히 유명한 책, 인정받은 책을 찾아보는 편은 아니다. 오이가 누구에겐 등산용 수분섭취 야채로 사랑 받는 반면 누구에겐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막되먹은 쇠고집을 꺾은 책이 하나 있다. 전에도 북로그를 남겼지만 다시 꺼내 보자면 아라빈드 아디가의 화이트 타이거가 그 책이다. 유명했고 인정도 받은 책이었다. 그 지식인들에게 인정받았다는 타이틀 답게 적잖히 고지식한 면을 볼거라 앞서 걱정했는데 더할나위없이 수수한 문체가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을 책이다. 이 호밀밭의 파수꾼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바닥서부터 기대 없이 펼쳐들었다. 니가 유명해서 뭐 어쩔건데? 하는 반발이 거셌으면 오히려 거셌겠지. 호밀밭이라기에 요즘 TV에 이골날 만큼 자주 나오는 농촌 버라이어티를 책으로 옮겨쓴 건 아닌가 싶어서 더더욱ㅡ그정도로 사전 조사없이 읽었다ㅡ.

 

하지만 그 안엔 청춘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전부 바보에 멍청이라고 보는데다가(심지어 스스로도), 성적미달로 퇴학을 거듭하는데다, 나이에 안 맞게 골초이며, 술을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도 멀쩡한 이 탈선 소년. 이 탈선 소년을 바라보는 어떤 동정어림과 그리움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 녀석 만큼은 아니지만 탈선이라면 한 탈선 했던 사람으로서 그 고민 많던 사춘기를 다시 느껴보았다. 그때의 그 무모함을 후회라는 작은 상자에 꽁꽁 숨겨두었었는데 이젠 추억이란 커다란 상자로 옮겨 담을 때도 된 것 같다. 지금에 와서 지금 기준에 바탕을 두고 생각하기에 그 시절이 무모했던 것이지, 사실 그 때는 내 나름 최선의 방법이 아니었던가? 그 충실하리 만치 마음가는 대로 따른 선택을 좀 더 아름답게 봐줘야 하지 않을까?

 

또한 그 후회를 추억으로 승화시키는 동안 나는 또 다짐했다. 주인공처럼 이 때를 고민하고 이 때를 슬퍼하며 이 때를 즐기겠노라고. 사람들은 쉬이 말한다. '다 지나고 보니까 후회더라고, 그 때 왜 그랬을까?' 쉬이 말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어차피 지나간 삶에 후회하는 건 만국공통, 인종공통 아니겠는가? 매한가지 후회할 거 '선택'을 하는 순간만큼은 내 발끝부터 끓어오르는 본능에 따르리라. 그것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올지는 삶에 맡겨 보는 거다. 호밀밭의 파수꾼같은 삶을 꿈꾸다 결국 집으로 오게된 주인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