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저자
밀란 쿤데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9-12-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세기 최고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을 만나다! 민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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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농담으로 만났던 작가인 밀란 쿤데라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명불허전일지
빈수레가 요란할지, 읽어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유명세다.

 

시작부터 작가는 이분법, 혹은 건축저술가 임석재가 자주 사용하는 쌍개념을 들고 나온다. 가벼움과 무거움. 온 세상을 이 두 개념으로 구분짓고 무엇이 참인가를 네 인물의 삶을 빌어 추적해 나간다. 가벼움을 대표하는 남자 토마시, 여자 사비나. 무거움을 대표하는 여자 테레자, 남자 프란츠 이 네 남녀의 얼키고 설킨 이야기가 구소련의 체코 침략을 배경으로 펼쳐친다.

 

두 번째 문단에 쓴 '온 세상'을 다시 언급하고 싶다. 작가는 이 책에 총력을 기울인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만큼 소재의 범위가 너무나도 폭넓다. 시대 배경으로 쓰인 소련과 체코, 그리고 공산주의와 비공산주의, 남과 여 등 대립되는 쌍개념들이 무수히도 많이 등장한다. 읽으며 어느 것이 가벼움이고 어느 것이 무거움을 상징하는지, 또한 작가는 그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지 파악하는 게 꽤 고되다.

 

또한 썰풀이 방식도 상당히 특이하다. 작가는 3인칭 전지적작가 시점을 사용한다. 한데 마치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 같이 독자의 바로 옆에 있는 듯한 착각, 소설 내에 인물로 개입해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방식이 기존 소설들처럼 플롯전개에 의존한 게 아니라 철저히 지금 그 인물이 마음속 감정을 서술한다. 플롯은 소설의 뼈대인데 이 뼈대가 챕터마다 연결성이 부족하고 드문드문 이빨 빠진 느낌이다. 감정위주로 글이 흘러가다보니 읽는이 입장에서는 스토리를 따라 글에 하나되어 흘러간다는 느낌은 받기 힘들다.

 

이야기는 무덤덤한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결국 소설 내내 다룬 두 개념의 저울질은 해를 구하지 못하고 마무리된다. 결국 답은 없고 무거우나 가벼우나 행복하지 못하는 걸까? 지인인 某교수는 프란츠와 사비나의 결말로써 토마시와 테레자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는, 결국 무거움이 옳다는 것을 작가가 역설했다고 풀이했는데, 조금 반문이 든다. 그렇다면 굳이 토마시와 테레자를 죽이는 시나리오로 쓸 필요가 있었을까. 결국 결론은 보류다. 보류, 밀란 쿤데라가 살아온 삶을 생각해보면 이런 결말이 나올 만도 하다.

 



인간 종말 리포트. 1

저자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8-11-2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인간의 과욕과 허영이 불러온 멸망의 역사! 캐나다를 대표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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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읽은 디지털 네이티브가 희망찬 미래를 내다보는 책이었기에 이 책 이름이 눈에 띄었는지 모르겠다. 교양서와 소설로 형식은 다르나 미래라는 같은 주제를 가지고 낙관론과 비관론으로 갈리는 이 흔해빠지긴 했으나 매력 넘치는 주제.

  이 소설은 이종(異種)동물간에 유전자를 조합해 씨가 섞인 동물이 만들어질 것이며 더더욱 포악하고 무서울 거라 내다본다. 인간개조도 이루어져 공격, 범죄 성향 따위를 제거하고 발정기가 따로 있는 인간이라 부르기 뭐한 존재들이 태어난다. 이러한 파괴와도 같은 개조가 단 한 사람 천재 크레이크에게서 말미암았음을 강조한다. 문제는 그 천재의 도덕이 옳았냐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도덕이긴 하였나 하는 물음이다. 조물주라도 된 양 스스로 파괴주가 된 크레이크, 모든 물질문명을 파괴하고 자기가 만든 개조인간들인 크레이커들만 남겨놓고 떠난 그 행위는 곱게보면 대자연을 위한 '리셋'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또한 이 천재가 인간 종말을 불러 올 수 있게 만든 시스템도 문제다. 옮긴이가 책 끝머리에 남긴 글에도 나오듯 소설 속에 정부라는 심상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거대 조합들만 등장하고 이것들이 주로 회사인 걸로 보아 자본에 먹힌 권력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와 사랑과 관용보다 돈이 앞서는 사회. 이 사회가 결국 크레이크같은 변종천재를 낳았다는 역설일 수도 있다. 

 

농담,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상당히 만족했던 민음사의 책이다. 다만 앞의 두 책과는 달리 번역이 아쉽다.



호밀밭의 파수꾼

저자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9-01-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물질적 가치만 내세우는 세상의 비인간성에 염증을 느끼며 반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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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유명한, 또 인정받은 이란 형용사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여럿에게 그렇게 불려진다 한들 내가 접하고 그렇게 느끼지 않으면 내게는 별거 아닌 것뿐이다. 그래서 특별히 유명한 책, 인정받은 책을 찾아보는 편은 아니다. 오이가 누구에겐 등산용 수분섭취 야채로 사랑 받는 반면 누구에겐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막되먹은 쇠고집을 꺾은 책이 하나 있다. 전에도 북로그를 남겼지만 다시 꺼내 보자면 아라빈드 아디가의 화이트 타이거가 그 책이다. 유명했고 인정도 받은 책이었다. 그 지식인들에게 인정받았다는 타이틀 답게 적잖히 고지식한 면을 볼거라 앞서 걱정했는데 더할나위없이 수수한 문체가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을 책이다. 이 호밀밭의 파수꾼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바닥서부터 기대 없이 펼쳐들었다. 니가 유명해서 뭐 어쩔건데? 하는 반발이 거셌으면 오히려 거셌겠지. 호밀밭이라기에 요즘 TV에 이골날 만큼 자주 나오는 농촌 버라이어티를 책으로 옮겨쓴 건 아닌가 싶어서 더더욱ㅡ그정도로 사전 조사없이 읽었다ㅡ.

 

하지만 그 안엔 청춘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전부 바보에 멍청이라고 보는데다가(심지어 스스로도), 성적미달로 퇴학을 거듭하는데다, 나이에 안 맞게 골초이며, 술을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도 멀쩡한 이 탈선 소년. 이 탈선 소년을 바라보는 어떤 동정어림과 그리움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 녀석 만큼은 아니지만 탈선이라면 한 탈선 했던 사람으로서 그 고민 많던 사춘기를 다시 느껴보았다. 그때의 그 무모함을 후회라는 작은 상자에 꽁꽁 숨겨두었었는데 이젠 추억이란 커다란 상자로 옮겨 담을 때도 된 것 같다. 지금에 와서 지금 기준에 바탕을 두고 생각하기에 그 시절이 무모했던 것이지, 사실 그 때는 내 나름 최선의 방법이 아니었던가? 그 충실하리 만치 마음가는 대로 따른 선택을 좀 더 아름답게 봐줘야 하지 않을까?

 

또한 그 후회를 추억으로 승화시키는 동안 나는 또 다짐했다. 주인공처럼 이 때를 고민하고 이 때를 슬퍼하며 이 때를 즐기겠노라고. 사람들은 쉬이 말한다. '다 지나고 보니까 후회더라고, 그 때 왜 그랬을까?' 쉬이 말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어차피 지나간 삶에 후회하는 건 만국공통, 인종공통 아니겠는가? 매한가지 후회할 거 '선택'을 하는 순간만큼은 내 발끝부터 끓어오르는 본능에 따르리라. 그것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올지는 삶에 맡겨 보는 거다. 호밀밭의 파수꾼같은 삶을 꿈꾸다 결국 집으로 오게된 주인공처럼.

 

 



농담

저자
밀란 쿤데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1999-06-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펴냈던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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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효과란 영화가 있다. 지금 내가 한 행동 하나가 미래의 커다란 변화를 만든다는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렇듯 말 한 마디, 현재 일어나는 자그마한 사건, 결정은 미래에 대해 소스라칠만큼 커다란 권력을 갖는다. 이 이야기 안에서는 자기 애인에게 편지로 쓴 몇 마디 농담이 루드빅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다.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을 따와 패러디 해보자면 '참을 수 없는 농담의 무서움' 정도일까? 

 

그렇다면 과연 이 농담에 선과 악의 잣대질을 가한 것은 무엇이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책은 325페이지를 빌어 설명한다. <그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서 좋거나 나쁘지 않다. 오로지 어떤 행위가 어떤 질서 속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만이 그 행위를 좋게도 만들고 나쁘게도 만든다.> 질서,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라고도 할 수 있는 그것. 그것은 루드빅이 뱉은 농담을 악이라 여긴다. 루드빅의 진정과 의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회와 질서의 뜻이 그렇다. 질서가 그렇게 말한다면 동무도 여인도 그렇다고 여긴다. 제3의 시각에서 본다면 소름이 돋는 광경이다. 그저 그때의 질서가 사회주의가 아니었다면 사전 의미 그대로 농담이었을  몇 마디가 한 남자의 젊은 삶을 때론 짓밟고 때론 쾌락을 좇게 만들며 다시금 주저앉힌다. 질서가 내게 준 이미지, 그 이미지가 평생 날 좌우한다면 그만큼 매정한 일도 없으리라. 내 이미지의 변화 가능성을 굳게 잠그는 질서에 이골이 난 적도, 사람이라면 한 번쯤 있었으리라.

 

또한 책은 몇 단락으로 나뉘어 각 단락마다 화자가 바뀐다. 이점을 통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행위를 받아들이는 이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잡아낼 수 있다. 감정이입의 대상인 화자를 바꿈으로 한 사건을 그 화자의 주관성에 담아 평가 할 수 있고 각 단락마다 이 '사건'을 보고 평가하는 눈이 다르다. 귀신 같은 썰풀이다.

 

루드빅의 삶은 마지막 피난처인 고향으로 돌아와 커뮤니티 속에서 안식을 찾으려 했지만 그것조차 굳이 말하자면 실패와 비슷한 결말로 치닫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변화의 희망이 아직 남아 있고 내가 몸담은 사회의 질서, 이데올로기가 나를 루드빅에게 했던 만큼 못박지는 못하리라는 작은 바람으로 견뎌보는 것이다. 김훈의 '공무도하'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매캐하면서도 그렇다고 끊을 수는 없는 담배 같은 그런 글이다.